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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 장군 일대기 만주 간도 특설대 회고

by "천사 2023. 9. 9.

홍범도 장군의 육군 사관학교 흉상 철거 소식으로 한동안 나라가 시끄러웠습니다.  흉상철거 과정에서 백선엽장군의  일화 등이 소개되면서 백선엽 장군의 일대기 또한 여론의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이글에서는 백선엽 장군의 일대기와 만주 간도 특설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백선엽장군의 주요 경력

백선엽의 본관은 수원, 호는 우촌입니다. 대한민국의 육군참모총장, 함동참모의장 등을 지낸 군인이자 교통부 장고나 등을 지낸 관료입니다. 만주국 육군군고나 학교 제9기(1932년 설립된 봉천군관학교 박정희는 1939년에 설립된 만주 신경군관학교 2기)로 졸업하여 간도 특설대에서 장교로 복무하였습니다.

 

1945년 만주군 중위로 있을 때 광복을 맞아 평양에 돌아왔고, 독립운동가 조만식의 비서로 활동하다가 소련이 이북 지역에 진주하자 그해 12월 월남했습니다. 19446년 군정기 남조선 국방 경배대 제5연대 중대장을 맡았고, 1949년 제5 사단장이 되었으며, 1950년 개성 제1 사단장으로 승진한 이후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습니다. 

 

전쟁 초기 인민군에 패퇴하여 수도 서울이 조기 함락되는 원인을 제공하였으나 미군과 함께 다부동 전투 등에서 전공을 세우며 32세에 대한민국 국군 최초의 대장에 올랐고 태극무공훈장과 미국 은성무공훈장을 받았습니다. 1952년 휴전 회담 때 한국 측 대표단의 한 사람으로 휴전 문서 조인식에 참석했으며, 예편 후에는 교통부 장관을 역임하고 , 중국, 프랑스, 캐나다 대사 등을 지냈으며, 한국종합화학, 한국에탄올 사장도 역함 하였습니다. 

 

동생 백인엽과 인천대학교등 선인 재단을 설립했으며, 2020년 7월 10에 99세의 나이로 별세하여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습니다. 

 

 

만주국 군인 활동

1941년 12월 30일 만주국 봉천군관학교를 제9기로 졸업하고 수습군관을 거쳐 만주군 소위로 임관했습니다. 자무쓰 부대에 배속되었다가, 1943년 2월 간도특설대로 전근되어 3년 동안 근무하였습니다. 1943년 12월 러허성에서 간도 특설대 기박련 소속으로 팔로군 공격작전에 참가했으며, 간도 특설대는 1938년 12월 1일  기존에 있던 조선인 국경감시대를 폐지하는 대신에 팔로군을 소탕하기 위해 창설된 기구였으며 사령부는 간도성 연길 부근 명원구에 있었습니다.

 

병 기갑 혼성 부대로 출발한 이 부대는 당초 360명으로 발족되었으나 나중에는 800명 가까이 늘어났습니다. 부대장은 일본인 장교였으나 중대장의 반수와 소대장 이하 전 사병은 조선인이었습니다. 

 

1939년 창설 이후 만주국 북부에 있던 사회주의 계열 민족 해방세력인 팔로군, 동북항일연군, 조선의용대를 토벌하기 위한 특수 목절을 띈 북방 공산 게릴라 토벌 부대였습니다. 108차례 토공작전을 펼치기도 하였습니다. 

 

백선엽의 간도특설대에서의 구체적 역할은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백선엽이 남긴 회고록에 그의 활동 내역이 일부 보입니다.  글에 따르면 백선엽은 간도특설대에서 김찬규, 송석하, 김석범, 신현준, 이용, 윤춘근, 박창암, 등과 함께 근무했습니다. 

 

1944년 봄 열하성과 중국 북부에서 팔로군의 호라동이 활발해졌고, 이에 일제는 만주군 3개 여단을 파견했습니다. 백선엽과 간도특설대는 만주군 철석부대 산하에서 정보수집, 반공선전, 체표 된 항일세력 심문 등을 맡았습니다. 

 

1944년 여름, 간도 특설대는 러허성을 떠나 허베이성으로 이동했고, 백선엽과 간도특설대는 여기서 1945년 1월까지 항일 세력을 상대로 한 작전을 벌였습니다. 잔전이 끝나자 그는 원대복귀명을 받고 귀대했습니다. 1944년 가을, 평양에서 노인수와 결혼을 하였으며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할 당시 백선엽은 만주군 "헌병"중위였습니다. 그는 만주 전략공세작전을 만나 명월구에서 강제 무장해제를 당했습니다. 

 

 

백선엽 간도특설대 활동 회고

1993년 일본에서 출간된 "간도특설대의 비밀"에서 백선엽은 아래와 같이 회고했습니다. "간도특설대가 소규모이면서도 군기가 잡혀 있어 커다란 전과를 올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간도특설대가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신인이 섞여 있었다.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그는 회고에서 간도특설대를 우리라고 표현하였는데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동표에게 총을 겨눈 것이 사실이었고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라고 했다. 

 

또한 간도특설대의 활동에 대해 "민중을 위해 한시라도 빨리 평화로운 생활을 하도록 해주는 것이 칼을 쥐고 있는 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친일 행각 비난이 일자 그는 "동족상잔의 사례를 같은 조선인으로서 가슴 아픈 소회를 밝혔던 것"이라면서 자신이 직접 토벌했음을 의미하는 건 아니라고 설명했습니다. 

 

2000년 일본어로 발간된 회고록 <젊은 장군의 조선전쟁>에서 백서엽은 간도특설대에 대해 "일종의 툭 수부대로서 폭파, 소부대행동, 잠입 등의 훈련이 자중 행해졌다"라고 썼습니다. 

 

간도특설대는 대 비정규전 특수부대 형식을 취하고 있어 기동 타격, 공작, 정보, 심리, 매복, 추격, 섬멸작전을 주로 했었고, 또한 만주군 헌병대에도 종전까지 근무하여 향후 국군 육군 정보국장을 하고 한국전쟁시 빨치산토벌의 선봉장이 되는 계기가 된다. 또한 이는 그의 일본어 저서 대 게릴라전-미국은 왜 졌는가"로 이어지며 같은 1 사단장을 지낸 전두환이 대 비정규전 부대인 "특공여단"을 후방 2 군직할부대로서 창설하는 것으로 맥을 잇었습니다. 

 

 

지금까지 백선엽 장군의 출생 후 주요 경력 및 활동내역등을 확인해 보았습니다. 회고록에서 만주군 간도특설대에서의 활동한 부분이 자신의 과오라는 점도 밝혔고 625 전쟁에서는 국군의 지대한 영향을 비쳐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과연 백선엽 장군은 공일 클까요 과오가 클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