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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 의 일생 고구려 대막리지

by "천사 2023. 9. 24.

연개소문은 (594년 ~ 666년) 고구려 말기의 장군이자 정치가입니다. 일명 개금으로도 불립니다.

중국의 구당서, 신당서 및 자치통감, 삼국사기 열전에서는 천 개 소문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642년 막리지의 난을 일으켜 대막리지를 신설하고 연개소문, 연남생, 연남건으로 세습되는 연 씨 정권을 26년간 무인정권을 세워 고구려 왕조의 실권을 맡았습니다. 

 

 

연개소문의 생애

천리장성 축조 책임자

연개소문은 연태조의 아들로서 고구려가 멸망할 때 당에 투항하여 당의 관직을 받은 연남생의 묘지명 "천남생모지명"에 따르면 남생의 할아버지 즉 연개소문의 아버지는 태조, 할아버지는 자유라고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사람모두 고구려의 막리지 관직을 세습하였으며 연개소문이 동부대인 및 막리지를 지낸 아버지가 죽은 뒤 아버지의 자리를 오르려 하였으나 그의 품성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사람들의 바대가 힘 하여, 그 자신이 직접 여러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애걸할 끝에 겨우 아버지의 자리를 세습할 수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연개소문은 연태조의 후임으로 천리장성 축조 책임자 역할을 맡아 이를 계기로 장안성의 중앙정계에 발을 들였습니다. 

 

막리지의 난 "쿠데타"

삼국사기에서는 영류왕 14년 (631년)에 고구려의 서쪽 국경에 천리장성을 쌓을 때, 왕은 연개소문으로 하여금 장성 축조를 감독하도록 하였습니다. 영류왕은 연개소문의 성품이 두려워 그를 죽이려고 모의를 했으나 연개소문은 이것을 사전에 눈치를 채고  군사열식에서 대신 100~180여 명을 초대하고 모두 살해하고 영류왕을 죽이는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그리고 영류왕의 조카였던 장을 새로운 왕으로 세우고 자신은 대막리지가 되었습니다. 

 

보장 와 옹립

연개소문이 보장왕을 옹립한 해에 신라는 백제 의자왕의 공격으로 대야성을 읽고, 고구려와 백제에 의해 당항성을 공격당했습니다. 신라의 김춘추가 고구려에 백제 공격을 위한 군사를 요청하러 왔을 때 연개소문은 태대대로로서 그를 영접하기도 합니다. 

 

고구려 조정은 김춘추의 군사 요청을 수락하는 조건으로 신라가 차지한 장수와 시절의 옛 고구려 영토 반환을 요구했고, 이를 거부한 김춘추는 고구려의 감옥에 감금되었다가 "귀국 즉시 영토를 반환하겠다"는 거짓을 편지로 보장왕에게 바치고 간신히 풀려났습니다. 

 

대당항쟁

보장왕 2년 (643년) 3월 연개소문은 당의 숙달 등을 초청하고 <노자도덕경>을 들여오는 등 고구려에 도교를 수입하여 불교 세력의 견제하며 평양에 새로 용언성을 쌓았습니다.  당 태종은 고구려에 대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척 연개소문의 도사 파견 요청을 수락하는 한편 보장왕을 상국요동군왕 고려왕으로 책봉해 고구려왕의로서 지위 계승을 공인해 주기로 했습니다.

 

고구려에서 군사를 얻는데 실패한 신라는 9월에 당에 사신을 보내 구원요청을 했고, 당은 모자와 3년 사농승 상리현장을 보내 고구려에 신라 공격을 중지할 것을 요구했는데 , 상리현장이 고구려에 도착했을 때 이미 연개소문은 신라를 공격해 두 개의 성을 차지한 상태였고 <삼국사기> 보장 와의 명으로 소환된 그는 상리현장에게, 과거 수나라가 과거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신라가 그 틈을 노려 빼앗아간 고구려의 옛 영토 5백 리를 돌려줄 때까지 전쟁을 그만둘 수 없다고 당의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연개소문의 말년

보자 왕 19년(660년) 신라와 당의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해 백제를 멸망시켰고, 고구려에서는 신라의 칠중성을 공격하였으나 패하고 맙니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치기 위해 평양 방면으로 소정방을 보냈으며 고구려군을 패강에서 격파하여 마읍산을 빼앗고 수도 평양 부근까지 접근하기도 했습니다.

 

연개소문은 아들 연남생을 압록강에 보내어 요동 방면의 공격을 맡고 있던 글필하력의 군대를 막게 했지만, 글필하력은 얼어붙은 압록강 위를 걸어 고구려군을 공격해 3만 면의 고구려군이 전사하고 연남생은 가까스로 죽음을 면 하는 등의 참패를 겪었습니다. 하지만 글필하력은 직후 철륵족이 일으킨 반란으로, 부여 방면에서의 고구려 공격을 맡았던 소사업과 함께 철륵 진압에 도입됩니다. 

 

보자 왕 22년(662년) 옥저 방면의 고구려 공격을 맡았던 좌효위장군 백주자사 방효태가 사수 강가에서 연개소문의 군대에 포위되고, 10만 명에 달하는 전군이 몰살당하고 방효태 자신도 13명의 아들과 함께 전사합니다. 

평양을 포위했던 소정방도 신라의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이 수송해 준 군량을 받고 폭설을 이류로 곧장 출수하였으며, 당의 고구려공격은 실패로 끝납니다.  이후 연개소문은 666년 사망합니다. 

 

 

고구려의 대막리지 연개소문

고구려의 대막리지 연개소문
임기 642년 음력 10월 ~666년 음력 5월
전임 신설
후임 연남생
군주 보장왕

 

 

연개소문 신상정보

신상정보
별명 개금,이리가수미
출생일 594년
출생지 고구려 동부 순노부 "추정"
사망일 666년음력5월
부친 연태조
모친 소씨
형제자매 연정토(남동생)
자녀 남생,남건,남산
직업 장군,정치인

 

 

지금까지 고구려 장군이자 정치가인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생애 및 신상정보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연개소문의 자료는 삼국사기에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아 대부분은 중국 고서등을 참고하여 알려져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역사서에 더 자세히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많이 아쉬운 것 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