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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과 임진왜란 및 옥포해전, 사천해전,한산도 대첩

by "천사 2023. 9. 18.

이순신 장군은 1545년 4월 28일 태어났고 1598년 12월 16일 삶을 마감했던 조선 중기의 무신이었습니다. 

본고 나은 덕수, 자는 여해, 시호는 충무였으며, 한성 출신이었습니다. 문반 감누 출신으로 1576년 무과에 급제하여 그 관직이 동구비보 권관, 훈련원 봉사, 발포진 수구만호, 조산보만호, 전라남도수사를 거쳐 정헌대부 삼도수군통제사에 이르렀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어린시절

한성 건천동에서 이정과 초계 변 씨의 셋째 아들로 1545년 4월 28일이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건천동에서 보냈고, 외가인 아산에서 소년기를 보냈습니다. 이정은 자산의 네 아들에게 고대 중국의 성인으로 알려진 복희, 요임금, 순임금, 우임금의 이름자를 붙여 주었고, 셋째 아들이었던 그에게는 순신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무과 급제

 

1565년 이순신은 방 씨와 혼인하고 보성군수를 지낸 장인 방진의 후원으로 병학을 배우면서 무과를 준비하였습니다. 28살이던 1572년(선조 5년) 훈련원 별관에 응시했으나 시험을 보덕중, 말에서 낙마하여 주변 사람들이 기절한 줄 알았으나 옆에 있던 버드나무껍질을 벗겨 다리를 동여매고 시험을 끝까지 치렀습니다. 하지만 결국 시험에서는 낙방하고 말았습니다

 

4년 뒤인 1576년(선조 9년) 그의 나이 32살에 식년시 무과에 병과 제4인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 봉사로 처음 관직에 입적하였고 조선시대 무과 함격자 분석에 의하면 당시 그의 나이는 현대인의 상식과 달리 늦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급제 후 1576년 12월 동구비보 권관을 거쳐 1579년에 10개월간 해미에서 훈련원 봉사로 근무하였습니다. 훈련원 봉사 재직 중 자신의 친구를 훈련원 참군으로 추천하는 병조정랑 서익의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그 뒤 36세가 되던 1580년 7월에 전라도 발포의 수군만호로 전근되었습니다. 

 

 

임진왜란

1592년 (선조) 5월 1일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끌던 일본군 함대 700척이 오후 5시경 부산포를 침략하여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습니다. 당신 선봉군의 병력은 약 16만 명이었습니다. 이순신의 전라도 좌수영에 일본군의 침략이 알려진 때는 원균의 바발이 도착한 5월 26일 밤 10였습니다. 이순신은 그 즉시 조정에 장계를 올렸고 아울러 경상, 전라, 충청도에도 왜의 침략을 알리는 파발을 보냈습니다. 

 

그 뒤 이순신은 휘하의 병력 700여 명을 비상 소집하여 방비를 갖추도록 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순신은 도주를 시도한 군졸 황옥현을 참수하기도 했습니다. 전열을 정비한 전라좌수영 소속 함대는 6월 8일까지 수영 앞바다에 총집 경하도록 명령이 내려진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일본군 함대는 이미 전라좌도 앞바다에 도달하였고 다음날 9일에 이순신은 전라 우도 수군이 도착하면 전투를 벌이겠다고 장계를 조정에 올렸습니다.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 파죽지세로 북진해 오자 조정은 보름 만에 한성을 버리고 개성으로 피난했으며, 이어 평양의 거쳐 의주까지 퇴각했습니다. 선조는 1593년 9월 21에 한성을 탈환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몇 번을 주저하다가 1593년 10월 1일에 도성으로 돌아왔습니다. 

 

옥포해전

옥포해전은 이순신의 첫 승전을 알리게 된 해전입니다. 6월 16일 정오 옥포항에서 정박하여 옥포에 침략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모두 26척을 침몰시켰으며, 잡혀있던 포로들은 구해냈습니다. 같은 날 오후에는 웅천현의 함포 앞바다에서 큰 배 한 척을 만나 이 또한 격파하였습니다.

 

전투는 17일에도 계속되었으며, 적진포에 일본군이 보유한 군선 13척을 침몰시켰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육지로 도망간 적들을 쪼지는 못하였습니다. 이때 조선 조정은 이미 한양에서 파천하여 평안도로 후퇴하고 있었습니다. 27일 에는 도원수 김명원이 임진강 방어에 실패하여 일본군이 황해도가지 진격하는 것을 허용하고 말았습니다. 

 

사천해전

전라우수영군의 함류가 늦어지자, 7월 8일에 이순신은 뱃머리를 돌려 노량으로 향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원균의 경상우수영군을 만났어며, 이날 사천 선창에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적선 30여 척을 쳐부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천 해전입니다. 이전투에서 이순신은 왼쪽 어깨 위에 관통상을 입었고 이해 전은 두 번째 출동하여 벌어진 첫 번째 전투였고, 또한 거북선이 출전한 첫 번째 전투였습니다. 

 

이순신 함대는 7월 10일 에도 전투를 벌여 승리하였는데, 일본군이 보유하던 화포에 비하여 성능이 우수한 지자총통 등의 화력이 승리의 원인이었습니다. 이순신의 함대는 계속하여 적을 추격하여 개도로 협공하였으며, 7월 12일 에는 전라도 우수사와 합류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13일 적 함대를 만나 큰 배 한 척과 중간 크기의 배 0척 작은 배크기의 배 100척을 공격하였습니다. 

 

한산도 대첩

한산도 대첩은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로 , 1592년 8월 14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이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입니다. 이 전투에서 육전에서 사용되던 포위 섬멸 전술 형태이 ㄴ학인직을 처음 펼쳤습니다. 

 

이순신의 함대는 8월 10일에 출발하여 12일에 노량에 이르렀고, 이곳에서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류하였습니다. 이때 적선이 출몰한다는 첩보를 얻어 14일 큰 배 36척 중간배 24척 작은 배 13척을 만나 전투가 벌여졌습니다. 조선군 연합함대는 거짓으로 후퇴하는 척하여 적들을 큰 바다로 끌어낸 다음, 모든 군선들이 일제히 학익진 진형을 갖춰 지자총통, 현자총통, 승자총통을 발포하여 적함선을 궤멸시키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포격으로 적함을 깨트린 뒤 적함의 갑판에서 백병전을 벌여 일본군을 격퇴하였으며, 여러 명의 포로들을 구해 냈습니다. 이날 일본군은 큰 배 한 척, 중간배 일곱 척, 작은 배 여섯 척만이 후방에 있어 도말을 칠 수 없었습니다. 

 

8월 15일 안골포에 직선 40여 철이 정박해 있다는 보고를 받아 16일 학익진을 펼친 채 진격하여 왜선 59척을 침몰시켰으며 한편 음력 7월 말에 이르러서야 육전에서도 홍의장군 곽재우가 승리하였으며, 홍계남이 안성에서도 승리를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이순신 장군의 어린 시절과 무과 급제 및 임진왜란 첫 출정이었던 옥포해전 및 사천해전 가장 큰 승리를 거둔 한산도 대첩까지 알아보았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부산대첩에서부터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해전까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