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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 부산해전 ,웅포해전,명량해전

by "천사 2023. 9. 21.

앞번 글에서 이순신 장군의 어린 시절과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옥포해전, 사천해전, 한산도 대첩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글에서는 이후 부산해전, 웅포해전, 명향해전까지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를 소개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부산해전

1592년 8월 한산도 대첩의 대승을 이루고 8월 말 이순신 장군의 함대는 전열을 정비하고 부산으로 출정을 합니다. 당포에서 경상 우수사와 합류하였으며, 29일 적들의 동태를 파악하고 그날부터 전투를 시작하였습니다. 1592년 음력 9월 1일 아침, 화준구미에서 일본군의 큰 배 5척, 다대보 앞바다에서 큰 배 8척, 서평포 앞바다에서 큰 배 9척 , 절영도에서 큰 배 2척을 만나 격파하였고, 부산 앞바다에 이르러 적의 소굴에 있는 400여 척의 배중 적선 100여 척을 쳐부수고 2일까지 전투를 벌였습니다. 이때 배들을 모두 부수면 상륙한 일본군이 몰려 도망갈 방법이 없어지므로 후일 수륙에서 함께 공격하기 위해 함대를 물렀습니다. 

 

이렇듯, 네 차례의 큰 싸움을 통해 일본군을 수로를 통하여 서해에 대한 해상권을 장악하여 보급로로 사용하려던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으며, 곡창지대인 전라도의 침략 또한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의 진격은 기세가 꺾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네 번의 전투를 거치는 중 , 이순신이 아끼던 휘하장수인 정운이 전사하였습니다.

 

 

원균과의 불화

1592년 6월 원균이 이순신과 연명으로 장계를 올리려 하였으나, 이순신이 먼저 단독으로 장계를 올렸습니다. 이로부터 각각 장계를 올려 조정에 싸움의 결과를 보고하였으며, 때문에 두 장군의 사이에 골이 깊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난중일기에 원균의 성품과 인경에 문제가 많으며, 일의 처리에도 불말인 점을 자구 기록되어 있습니다.

 

1593년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이순신의 명령을 받게 된 원균은 이에 반발하여 명령을 어기는 등 문제를 일으켜 두 사람의 관계가 더욱 벌어졌습니다. 이순신은 조정에 원균과의 불화에 스스로 책임을 지고 자신을 파직시켜 달라고 청하자, 조정에서는 원균을 충정도 병마절도사로 옮겨 제수하였습니다. 

 

이후 원균은 이순신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뜨렸으며, 이원익이 제찰사로서 증거를 찾아내려 했으나, 오리혀 이순신이 반들하고 충성심이 강하다는 사실만 확인했다고 합니다.

 

 

웅포해전

이순신 함대는 1593년 2월 10일 웅천현 웅포로 진격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전의 경험에 비추어 보아 정면승부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일본군은 조선 수군을 왜성 깊숙이 유인하여 격파하려는 유인책을 사용합니다. 조선 수군은 이에 유의하며 화도등을 이용한 공격을 하였으나, 싸움은 지루한 공방전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이후 일본군은 각지에 왜성을 쌓아 방비를 하며 왜성을 전략적 거점으로 삼아 조선수군의 부산성 방면으로의 진출을 막음으로써 보급선을 유지하려는 전략을 구사하게 되었습니다. 웅천에서의 일본군을 소탕하기 위한 전투는 음력 3월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때 전라도의 수군의 정병 상하번 외에 보인까지 총동원, 4만여 명을 웅포 해전과 전라도 해안선방어에 투입하였습니다. 

 

 

삼도 수군통제사

음력 6월 이순신은 한산도로 진을 옮겨 전열을 정비하였습니다. 음력 7월부터 거제도와 진해, 가덕도등에서 일본군과 대치하는 상황이 계속되었습니다. 조선 3도 수군은 견내량에 방어선을 설정하였습니다. 한편 일본군은 거제도의 영등포와 제포 사이를 방어선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음력 8월 1일, 조선 조정은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하고 본직은 그대로 겸직하도록 합니다.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에서 백성을 모아 소금을 굽고 곡식을 비축하여 든든한 진을 구축하기 시작합니다. 한편 김성일 등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성은 함락 되었으나, 결과적으로 진주를 지켜 전라도 호남 지방을 방어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이후 이 지역을 통해 조선의 군수 물자와 전쟁 수행 능력이 보장되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원균과의 불화는 계속되었어며  선조는 이순신에게 일본군을 적극적으로 공격하라는 명을 받지만 조선의 군사력으로는 일본군과 육전에서 대등한 전투를 수행할 능력이 부족하다며 견내량 전전을 유지하면 공격에서 신중함을 임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선조는 이순신 장군의 통제사직을 해임하고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릅니다. 

 

 

두 번째 백의종군

이순신장군의 선조의 공격명령에 응하지 않아 결국 한성으로 압송되어 투옥되었습니다. 그때 우의정 정탁의 상소로 사형은 모면하였으며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 종군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1597년 삼도수군통제사를 이끈 원균은 칠 천향 해전에서 일본군에 크게 패배를 하였습니다. 이에 조정 조정은 다시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때 조선의 수군을 전부 모아 정비를 하였으나 함선이 고작 12척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으며 내가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 수군을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라는 비장한 결의를 표하였다고 합니다. 

 

 

명량해전(울돌목)과 이순신 장군의 전사

 

1959년 10월 25일 일본군 수백 척의 이동 정보를 접한 이순신은 명향 해협에서 대적하기 위해 13척의 전선을 이끌고 출전합니다. 명량해협은 "울돌목"이라고도 불리었는데 폭이 294m 밖에 되지 못하여 바다 표층의 유속이 6.5m/s정도로 굉장히 빠르고, 밀물과 썰물 때에는 급류로 변하는 곳이었습니다.

 

이순신을 울돌목의 조류가 싸움에 불리함을 깨닫고 새로 합류한 1척을 추가한 13척의 전선으로 우수영 앞바다인 임하도로 진을 옮겨 일본 함대를 그곳으로 유인해  최소 130척 이상의 전선을 격파하였습니다. 난중일기와 선조실록에는 약 30여 척을 격침했다고 기록하였으나 이것은 통제사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공격부대의 전과일 뿐 임하도의 좁은 목을 마고 있던 수비 부대의 전과나 피해 사항을 기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난중잡록과 선묘중흥 지을 통해서 조선 수군은 중, 후반부터 화전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통제사가 적의 선봉대중 30여 척을 격파하였지만 해남 명량대첩비에는 500척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실제 격파된 되선은 30여 척보다 많을 것으로 파악됩니다. 

 

"적국의 배를 쳐부순 것이 오백 척이며 그 장수마다 시를 베었다"<해남 명량대첩비>

이를 명량해전이라고 하며 이 해전의 승리로 조선 수군은 나라를 위기에 빠뜨렸던 정유재란의 전세를 역전하게 됩니다. 일본은 곤궁에 빠져 명나라 장군에게 뇌물을 보내어 화의를 꾀하였으나 이순신은 이를 반대하고, 이듬해 1598년 음력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사하고, 삼아 직전 출군하라는 유언을 남기며 일본군이 철수를 하게 됩니다. 

 

노량해전에서 전사

1598년 11월 18일 조순 수군 70여 척, 명나라 수군 400척이 노량으로 진군합니다. 군사는 1만 6천 명이었습니다. 이순신은 명나라 부총병 진린과 함께 1598년 음력 11월 19일 새벽부터 노량해협에 모여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였고, 일본으로 건너갈 준비를 하고 있던 일본군 선단 500여 척 가운데 200여 척을 격파, 150여 척을 파손시켰습니다. 전투는 정오까지 이어졌고, 관음포로 달아나는 일본군을 추격하던 이순신은 날아온 탄환에 맞아 전사하게 됩니다. 

 

죽기 전에 그는 "지금은 싸음이 급하다. 나의 죽음을 아리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향년 54세 낙안군수 방덕룡, 가리포첨사 이영남과 명의 장수 등자룡도 함께 전사합니다. 

노량해전을 끝으로 임진왜란은 끝나게 됩니다. 선조실록의 사관은 당시 사람들이 모두 죽은 이순신이 산 왜놈들을 격파하였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이순신 장군의 후반부인 부산해전에서 노량해전의 전사하는 부분까지 알아보았습니다. 이순신장군은 사후에도 대한민국 국민에게 신분과 시대를 막론하고 존경과 숭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각각의 여론조사에도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도 조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