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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의열단장 김원봉 의 독립운동가일생

by "천사 2023. 10. 19.

안녕하세요 1004 블로그입니다. 오늘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 김원봉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인제강점기라는 어려운 시기에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독립운동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 천천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독립운동가 김원봉의 일생

김원봉(1898년 9월 29일 ~ 1958년 11월)은 독립운동가 이자 정치인이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의 의열단장을 역임하며, 호는 약산, 본관은 김해입니다. 

1919년 아나키즘 단체인 의열단을 조직하였고, 황푸 군관학교를 거쳐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였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함류하여 임시의정원 의원, 한국광복군 부상령관 겸 제1 지대장으로 활동하였고, 1944년 임시정부 군부부장에 선출되었습니다. 

 

1946년 2월 민족주의 민주전선 공동의장, 6월 인민광화당 위원장을 역임하였고, 1948년 김구 , 김규식 등과 함께 남북 협상에 참여한 뒤에 그대로 북한에 남았습니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광화국 정부수립 후 국가검열상, 조선인민공화당 중앙위원회 워원장, 노동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였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군사위원회 평안북도 전권대표로서 후방에서 북한군의 군량미를 생산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김일성으로부터 로력훈장을 수여받았고, 남파활동을 벌이기도 했는데, 실제로 1954년 1월 25일 김원봉의 직접 지휘 하에 대한민국의 경제혼란 및 선거 방해를 목적으로 남파된 간첩단 4명이 체포되었습니다. 이후 김일성과의 정치 암투에서 패배하여 1958년 10월 반국가적 및 반혁명적 책동의 죄로 대의원 권한을 박탈되었고, 체포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사망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지만 정치수용소에서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합니다. 

 

 

신흥 무관학교 시절

난징의 진링대학에서 그는 독일어, 중국어, 영어를 배웠고 1년 다니다가 중퇴,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단으로 파견하려는 상하이 지사들의 정책에 반발하여, 독립을 위해서는 군대를 양성해야 된다는 뜻을 품고 간도로 가서 군대를 조직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1919년 2월 만주로 건너가 만주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합니다. 여기서 6개월간 폭탄 제조법, 체력 단련, 군사학 교육등을 받았고, 신흥무관학교에서 수련하던 중 졸업 3개월을 남겨둔 채 중퇴합니다. 

 

만주로 떠날 의사를 교환 김경천에게 표시했으며, 유세주, 이종암, 한봉인, 한봉근, 신철휴, 서상락, 이성우, 권준, 강세우 등과 뜻을 같이하기로 했다고 말하였지만 집단 탈출은 동기생들의 사기를 꺾을 것이라 하여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신흥무관학교 교장 이시영을 찾아가 뜻이 있어서 자퇴한다며 특별히 사태를 허락받고 신흥무관학교를 나왔습니다. 

 

 

의열단 창설과 무장활동

1919년 11월 9일 길림성에서 일본의 침략본거를 파괴할 것을 결의하고 의열단을 조직하여 의백에 취임, 국내의 기관파괴, 요인암살 등 여러 차례 무정부주의적 항일 투쟁활동을 벌였습니다. 단원은 김원봉, 얀건호, 곽재, 김옥, 윤세 위, 윤치형, 이성우, 강세우, 한봉인, 신철휴, 배공선, 서상락, 권준 등 13명의 의열단이었습니다. 그들은 공약 10조를 발표합니다. 

  1. 천하에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하기고 한다. 
  2.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만인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바쳐 희생하기로 한다. 
  3. 충의의 기백과 희생정신이 확고한 자라야 단원이 될 수 있다.
  4. 단의를 우선하고 단원의 의를 급히 한다.
  5. 의백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하게 한다.
  6. 어떤 시간, 어떤 곳에서든 매일 1차씩 사정을 보고한다.
  7. 어떤 시간, 어떤 곳에서든 초회에는 필히 응한다. 
  8. 죽음을 피하지 아니하여 단의에 뜻을 다한다. 
  9. 일이 구를 위하여 구가 일을 위하여 헌신한다.
  10. 단의를 배반한 자는 학살한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합류

1942년 김원봉은 한국광복군 부사령관이 됩니다. 1942년 7월 중국 화묵에서 조선독립동맹이 창설되자, 민족혁명당과 의용대의 대원들 일부는 김원봉의 곁에서 이탈하여 독립동맹으로 건너갑니다. 1943년 박차정은 총상 후유증으로 사망을 합니다. 1944년 장준하를 영입하려 했으나, 거부당하고, 장준하는 "그가 미인계를 써서 현혹시키려 했다"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한편 김원봉은 조선의용대를 탈퇴하고 연안으로 떠난 동지들과 꾸준히 연락을 하였습니다. 이에 이범석은 "김원봉 일파는 자기세력 확충에 혈안이 되어 옌안과 내통을 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1945년 1월 민혁당 중앙감찰위원장이었던 우강 최석순의 맏딸 최동욱과 결혼을 하였고, 그리하여 아들 김중근을 나았습니다. 

 

 

광복 후 귀국

1945년 12월 3일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제2진으로 귀국을 하게 됩니다. 1945년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조선인민공화국의 군사부장으로 선임되었지만, 임시정부와 함께 미군정에 의해 부정되어 해산되고 맙니다. 1946년 2월 조선공산당이 좌익 단결을 위해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했는데, 김원봉은 2월 14일 민주주의 민족전선 중앙위원 및 5명의 공동의장에 선출되어 활동을 하게 됩니다. 

 

1947년 7월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했던 여운형이 암살되고, 1948년 4월 남북협상 때 김구, 김규식, 박헌영, 리극로 등과 함께 남한 측 정치단체대표의 한 사람으로 협상에 참여하였고, 그대로 북한에 남게 됩니다. 다만 월북이전 김원봉은 자신이 중경에서 활동할 때에 비서를 지냈던 사마로에게 "북조선은 그리 가고 싶지 않은 곳이지만 남한 지역의 정세가 너무 나쁘고 심지어 나를 위협하여 살 수가 없다"는 편지를 보내며 자신의 월북이 어쩔 수 없음을 피력하였습니다. 

 

이후 북한에서 김일성이 정치암투에서 밀리며 정치수용소에 갇혀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일제 강점기에서 태어나 활동을 하던 김원봉의 생애와 의열단장으로써 생애를 살아온 김원봉과 정치가로서의 생애 등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살아온 독립운동가 김원봉이지만 말년에는 정치에서 꽃을 피우지 못하고 아쉬운 일생을 알아보았습니다.